산하(山河)에 깃든 억겁의 숨결, 그 찬란한 맥박을 따라서

창밖으로 어슴푸레 새벽빛이 밀려들 때, 저는 종종 산등성이를 타고 흐르는 안개의 군무를 바라봅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라, 이 땅이 밤새 묵혀두었던 전설을 토해내는 깊은 숨결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라 부르는 이 좁고도 넓은 땅, 그 속의 강산(江山)은 단순한 풍경의 집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눈물과 웃음,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자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이 땅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제게는 마치 어머니의 주름진 손등을 만지는 것처럼 벅차고도 숙연한 일입니다.

첩첩산중, 그 푸른 능선이 가르쳐준 인내

대한민국의 산은 날카롭거나 위압적이지 않습니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처럼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함 대신, 우리네 할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넉넉한 곡선을 가졌습니다. 설악산의 공룡능선이 보여주는 기개는 서슬 퍼런 선비의 지조를 닮았고, 지리산의 완만한 능선은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어머니의 넉넉한 치맛자락을 닮았습니다.

저는 가끔 산에 오르며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낙락장송을 봅니다. 흙 한 줌 없는 척박한 곳에서도 기어이 가지를 뻗어 하늘을 우러르는 그 생명력은, 수많은 외침과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이 땅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기상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보여주는 그 화려한 변신—봄의 연분홍 진달래, 여름의 울창한 녹음, 가을의 타오르는 단풍, 그리고 겨울의 결백한 설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견뎌라, 그러면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이 온다”라고 말입니다. 산의 능선은 그저 지형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인내의 길입니다.

굽이치는 강물, 멈추지 않는 역사의 노래

산이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등이라면, 강은 우리 몸속을 흐르는 혈관입니다. 한강의 물줄기는 비좁은 골짜기를 지나고 거친 바닥을 훑으며 마침내 서해로 나아갑니다. 그 흐름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가뭄에 바닥이 드러날지언정, 강은 자신의 운명을 포기하지 않고 바다라는 거대한 꿈을 향해 묵묵히 나아갑니다.

낙동강의 굽이치는 물결 속에는 영남 유생들의 문향(文香)이 배어 있고, 금강의 부드러운 흐름에는 백제의 아련한 슬픔과 찬란한 예술혼이 녹아 있습니다. 한강은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사의 질곡을 뚫고 올라온 우리 국민의 땀방울을 기억합니다. 강물에 손을 담그면 느껴지는 그 차가운 전율은,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내가 연결되는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합니다. 물은 바위를 깎아 길을 만들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세상을 적십니다. 겸손하지만 강한 그 물의 정신이 바로 이 나라 강산의 힘입니다.

섬과 바다, 열린 마음으로 향하는 지평선

삼면을 둘러싼 바다는 우리에게 끝없는 호기심과 도전 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동해의 푸른 물결은 떠오르는 태양을 가장 먼저 맞이하며 우리에게 매일 새로운 희망을 선사합니다. 서해의 갯벌은 수많은 생명을 품어 기르는 대지의 자궁이며, 남해의 다도해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한 절경으로 우리의 심상을 풍요롭게 합니다.

특히 독도와 울릉도, 그리고 제주도는 이 땅의 자부심입니다. 거친 파도를 견디며 동쪽 끝을 지키는 독도의 외로운 기개와, 화산의 흔적을 예술로 승화시킨 제주의 이국적인 풍광은 대한민국이 가진 다채로운 매력의 정점입니다. 바다는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는 통로였습니다. 그 끝없는 지평선을 보며 우리는 협소한 사고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꿈꾸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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